전기차의 배터리는 거대한 보조 배터리다. 80kWh급 배터리는 일반 가정의 1주일치 전기를 담을 수 있다. 이 에너지를 차 안에서만 쓰지 않고 외부로 흘려보낼 수 있다면, EV는 이동 수단을 넘어 분산 에너지 인프라가 된다. 그 흐름을 정의하는 세 가지 약어가 V2L·V2H·V2G다.
V2L — Vehicle to Load
차에서 일반 가전제품으로 직접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차량 외부 또는 트렁크 안의 콘센트에 가전을 꽂아 사용한다. 한국 시판 EV 중에는 현대 E-GMP 차량(아이오닉 5/6, EV6, EV9), 일부 기아·제네시스 차량에 표준 또는 옵션으로 들어간다.
- 출력: 보통 3.6kW (220V × 16A 안팎)
- 사용 예: 캠핑 전기레인지·전기난로·노트북·전동공구·휴대용 냉장고·게임기
- 활용성: 차박·캠핑·외부 행사·정전 대비 비상 전원
V2L은 EV 광고에서 가장 많이 노출되는 기능이지만, 일상에서 활용도는 운전자에 따라 갈린다. 캠핑·차박을 즐기지 않는 운전자에겐 거의 안 쓰는 기능이고, 캠핑족에겐 차 자체가 거대한 발전기 역할을 한다.
V2H — Vehicle to Home
차의 배터리를 집의 전기 시스템에 연결해, 정전 시 또는 야간 시간대에 집에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일부 닛산 리프 운전자들이 동일본 대지진 당시 V2H로 가정 전력을 유지한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V2H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다. 차량과 집의 전기 시스템을 연결하는 양방향 충전기·인버터·자동 전환 장치가 필요한데, 가정용 인프라 비용이 500만 원 이상으로 부담된다. 단독주택 거주자 중 정전이 잦은 지역이나 솔라 패널 보유자에게 매력적인 옵션이다.
V2G — Vehicle to Grid
가장 야심찬 개념이다. 수많은 EV의 배터리를 거대한 분산 에너지 저장소로 묶어, 전력 수요가 많은 시간대에 전력망에 전기를 되팔고, 수요가 적은 시간대에 충전하는 방식이다. 운전자에겐 전기 요금 차익이, 전력회사에겐 피크 부하 분산이라는 이익이 있다.
V2G는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상업화가 늦은 이유가 있다. 첫째, 양방향 충전 인프라가 거의 없다. 둘째, 한전이 가정 발전소 전기를 받는 정산 체계는 있어도 EV로부터 받는 정산 체계가 표준화되지 않았다. 셋째, 운전자 입장에서 배터리 추가 사이클로 인한 수명 단축 보상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2030년 전후로 V2G가 한국에서도 본격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 EV 보급률이 높아질수록 전력망 안정에 EV 배터리의 활용 가치가 커지기 때문이다.
왜 EV는 양방향 흐름의 핵심이 되는가
"주차된 차는 95% 이상의 시간을 멈춰 있다. 그 시간 동안 배터리가 잠자고 있는 것은 거대한 자원의 낭비다." — 자크 우종(Jacques Useldinger), 스마트 그리드 연구자
한국 등록 EV가 100만 대를 넘긴 시점에서, 이 차들의 총 배터리 용량은 약 70GWh에 달한다. 한국전력의 최대 부하 30GW의 두 시간 분량이다. 이 거대한 분산 자원이 V2G로 묶이면 원자력 발전소 수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미래 에너지 전환의 핵심 변수 중 하나다.